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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셰퍼(Francis Schaeffer)는 단순한 저술가를 넘어 20세기 미국 복음주의의 흐름을 바꾼 중추적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은 왜 사회에 참여해야 하는가》(원제: A Christian Manifesto)는 현대 미국 복음주의의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이면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텍스트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책은 단순한 신학 서적을 넘어, 당시 정치적으로 침묵하던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정치적 행동주의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신학적 청사진을 제공했다.1
본 보고서는 《기독교 선언》이 출간된 시대의 불안과 저자 프랜시스 셰퍼 개인의 지적·영적 변천 과정이라는 두 가지 축을 분리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책의 핵심 주장을 면밀히 해부하고, 그것이 미국 기독교 우파의 형성과 정치적 행동주의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추적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 보고서는 "셰퍼는 길 잃은 국가를 그 근본으로 되돌리려 했던 시대의 선지자였는가, 아니면 오늘날까지 미국 사회를 양극화시키는 '문화 전쟁'의 지적 토대를 제공한 설계자였는가?"라는 핵심 질문에 대한 다층적 답변을 모색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본 보고서는 신학적 분석, 역사적 맥락화, 철학적 비판을 아우르는 다학제적 접근을 통해 《기독교 선언》의 내용, 영향, 그리고 유산에 대한 포괄적인 평가를 제시할 것이다.
《기독교 선언》의 급진적이고 선동적인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 프랜시스 셰퍼의 사상적 궤적을 먼저 추적해야 한다. 그의 사역은 스위스 알프스에서 시작된 목회적이고 대화적인 '라브리(L'Abri)' 공동체와, 말년에 미국 사회를 향해 외친 정치적 '선언'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프랜시스 셰퍼의 신학적 뿌리는 개혁주의 장로교 목사로서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inerrancy)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깊이 박혀 있었다.3 그는 프린스턴 신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성경을 모든 지식과 삶의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여정은 단순한 교리적 확신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1951년에서 1952년 사이, 그는 심각한 영적 위기를 겪었다.3 당시 근본주의 진영 내에서 팽배했던 사랑 없는 정통, 지적 교만, 그리고 실천이 결여된 교리에 깊은 회의를 느꼈던 것이다.4 그는 교리가 살아있는 실재(reality)가 되지 못하고 지적 유희에 머무는 것을 목격하며, '참된 영성(true spirituality)'이란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고뇌했다.5 이 위기를 통해 그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실재성을 회복하고, 신앙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경험은 이후 그의 사역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 즉 기독교 진리가 지적으로 견고할 뿐만 아니라 실존적으로도 실제여야 한다는 신념의 토대가 되었다.
셰퍼의 영적 위기는 1955년 스위스 위에모(Huemoz)에 '라브리(L'Abri)'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6 프랑스어로 '피난처'를 의미하는 라브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허무주의와 실존주의에 빠져 지적으로 방황하던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열린 공간을 제공했다.3 라브리는 단순한 성경공부 모임이 아니라, 정직한 질문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찾아와 토론하고 삶의 해답을 모색할 수 있는 지적, 영적 안식처였다.9
라브리의 핵심 철학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영적 실체의 현시'로, 기독교 진리가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성경적 세계관의 총체성'으로, 성경이 종교적 영역뿐만 아니라 철학, 예술, 과학 등 인간 지식의 모든 분야와 관련성을 가진다는 믿음이다. 셋째,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과 공의의 실천'이다.11 이러한 철학 아래 라브리는 따뜻한 환대와 진지한 대화를 통해 기독교 변증을 실천했다.12 셰퍼는 예술과 문화를 기독교적 주제에만 국한시키지 않았으며, 문화 속에 숨겨진 세계관을 분석하고 기독교적 대안을 제시하는 '문화 변증'의 선구자적 모델을 구축했다.6
라브리에서 보여준 대화적이고 포용적인 접근 방식은 셰퍼의 말년에 이르러 점차 투쟁적이고 선언적인 입장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사상적 전환의 배경에는 그가 유럽 사회에서 목격한 '후기 기독교 사회(post-Christian society)'의 붕괴에 대한 깊은 우려가 자리 잡고 있었다.7 그는 유럽의 세속화와 도덕적 상대주의가 결국 미국 사회에도 동일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러한 우려가 현실화된 결정적 계기는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이었다. 셰퍼는 처음에 낙태 문제를 "너무 정치적"이라고 생각했으나, 점차 이를 단순한 정치적 사안이 아닌, 서구 문명의 근간을 흔드는 세속적 인본주의 세계관의 필연적 귀결로 인식하게 되었다.1 그에게 낙태 합법화는 인간이 스스로를 만물의 척도로 삼는 인본주의가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 시점을 계기로 그의 사역의 무게 중심은 개인의 질문에 답하는 문화 변증가에서, 사회 전체를 향해 경고하고 행동을 촉구하는 정치 운동가로 급격히 이동했다. 《기독교 선언》은 바로 이러한 사상적 전환의 정점에서 탄생한 결과물로, 기독교 세계관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그것을 정치적 영역에서 수호하기 위한 행동을 요구하는 전투적 선언문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라브리의 역설'이라 불릴 만한 내적 긴장을 드러낸다. 라브리의 정신은 모든 질문에 열려 있는 '피난처'에서의 대화와 환대를 기반으로 했다.9 반면, 《기독교 선언》은 두 개의 세계관을 적대적으로 규정하고 타협의 여지를 없애며, 시민 불복종을 포함한 정치적 저항을 촉구하는 닫힌 선언의 형태를 띤다.15 이러한 전환은 셰퍼의 사상적 기반이 처음부터 성경을 타협 불가능한 절대적 전제로 삼는 '전제주의 변증학(presuppositional apologetics)'에 있었음을 보여준다.17 라브리라는 목회적 상황에서는 이 전제가 개인을 향한 인격적이고 대화적인 방식으로 적용되었지만, '로 대 웨이드'라는 실존적 정치 위기 앞에서는 동일한 전제가 사회를 향한 투쟁적이고 정치적인 무기로 변모한 것이다. 즉, 외부의 위협 앞에서 '피난처'는 '요새'가 되었고, 사역의 목표는 개인의 회심을 넘어 사회적 대결로 확장되었다. 이 역설적인 전환을 이해하는 것이 그의 복합적인 유산을 평가하는 데 있어 핵심적이다.
《기독교 선언》은 진공 상태에서 쓰인 책이 아니다. 이 책의 폭발적인 영향력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초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거대한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지각 변동과 맞물려 있었다. 셰퍼의 선언은 당시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느끼던 불안과 분노에 신학적 언어와 명분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1973년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은 미국 기독교 우파의 정치적 동력을 촉발한 단일 사건으로 꼽힌다.18 이 판결은 수정헌법 제14조에 명시된 사생활의 권리가 임신중단을 결정할 여성의 권리를 포함한다고 판시함으로써, 사실상 미국 전역에서 낙태를 합법화했다.19 이전까지 사회·정치 문제에 비교적 거리를 두었던 다수의 복음주의 및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에게 이 판결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22 그들은 이 판결을 태아의 생명권을 부인하는 비도덕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국가가 신성한 생명의 영역을 침범한 월권행위로 간주했다. 프랜시스 셰퍼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낙태 문제를 개별적인 정책 사안이 아닌, 기독교적 가치 체계 전체를 위협하는 '세속적 인본주의'라는 거대 담론과 연결시켰다.2 이를 통해 그는 낙태 반대 운동에 강력한 철학적·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이는 복음주의자들이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의 대통령 당선은 미국 사회 전반에 보수주의의 물결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23 '레이거노믹스'로 불리는 공급중심 경제 정책(감세, 규제 완화), 국방비 증액을 통한 강력한 반공 외교 정책(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규정), 그리고 전통적 가치의 회복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새로운 보수 연합의 등장을 공고히 했다.25 당시 미국 사회는 한편으로 물질주의와 개인주의적 쾌락주의가 팽배했지만 28,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변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전통적 도덕과 가치를 회복하려는 열망 또한 강하게 분출했다. 레이건 대통령 자신이 "태아의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지 않는 나라는 결코 자유 국가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생명권 운동에 힘을 실어주었고 29, 이는 공화당과 새롭게 부상하는 기독교 우파의 정치적 연대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로 대 웨이드' 판결과 레이건의 부상이라는 두 가지 흐름 속에서 기독교 우파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조직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제리 폴웰 목사가 이끄는 '모럴 머조리티(Moral Majority)'와 같은 단체들은 낙태, 동성애, 공립학교에서의 기도 금지 등과 같은 사회적 이슈를 중심으로 보수적 기독교인들을 유권자로 조직화했다.30 이들은 단순히 대중 집회를 여는 것을 넘어, '헤리티지 재단'과 같은 보수적 싱크탱크를 통해 정책을 개발하고 엘리트들을 정치권에 진출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22 이러한 조직화 과정에서 프랜시스 셰퍼의 《기독교 선언》은 핵심적인 이론적 무기 역할을 했다. 이 책은 기독교 우파 지도자들에게 자신들의 정치적 활동이 단순한 이익 집단의 로비가 아니라, 국가의 영적·도덕적 기초를 수호하기 위한 거룩한 싸움이라는 신학적 확신을 심어주었다.1
결론적으로 셰퍼는 당시의 '시대정신(Zeitgeist)'을 창조했다기보다, 이미 존재하던 시대정신에 강력한 신학적 언어를 부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70년대 후반 미국 사회에는 도덕적 변화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불안 30, '로 대 웨이드' 판결이 가져온 법적 충격 18, 그리고 레이건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보수주의로의 회귀라는 흐름이 이미 형성되고 있었다.23 복음주의자들은 《기독교 선언》이 출간되기 전부터 이미 정치적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했다.22 셰퍼의 책은 이러한 흐름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접착제이자 정당화 기제였다. 그는 복음주의자들이 막연하게 느끼던 문화적 소외감과 도덕적 분노를, 하나님의 질서와 세속적 인본주의의 혼돈 사이에서 벌어지는 장엄하고 우주적인 세계관 전쟁이라는 서사로 재구성했다.33 《기독교 선언》의 진정한 힘은 정치적 이견을 신학적 명령으로 격상시킨 데 있다. 셰퍼는 당시의 정치 지형을 자신의 전제주의적 렌즈를 통해 해석함으로써, 공화당의 특정 정책(예: 낙태 반대)을 타협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조항으로 변모시켰다. 이러한 정파적 정치와 절대적 신학의 융합이야말로 이 책이 남긴 가장 중요하고 지속적인 유산이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기독교 우파의 강렬한 정치 참여를 설명하는 핵심 열쇠이다.
《기독교 선언》의 핵심 논지는 서구 사회가 직면한 위기의 근원이 정치나 경제가 아닌 '세계관'의 충돌에 있다는 진단에서 출발한다. 셰퍼는 이 책을 통해 기독교인들에게 눈앞의 개별적 이슈들을 넘어, 그 배후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사상적 전쟁의 실체를 직시하고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셰퍼의 논증은 서구 사회가 본래 기독교적 합의(Christian consensus) 위에 세워졌으나, 이제는 세속적 인본주의(secular humanism) 세계관에 의해 체계적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주장으로 요약된다.15 그는 이 두 세계관이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에 있다고 단언한다.
기독교 세계관: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한다. 이로부터 진리, 도덕, 그리고 인간의 양도불가능한 권리(inalienable rights)에 대한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기초가 마련된다.33
인본주의 세계관: 셰퍼는 이를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되는 물질주의적이고 우연에 기반한 철학으로 정의한다. 그는 이 세계관이 필연적으로 도덕적 상대주의, 진리의 해체, 사회적 혼돈으로 이어지며, 궁극적으로는 이 혼돈을 통제하기 위한 권위주의적 국가의 등장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33
셰퍼는 기독교인들이 현실 세계를 외면하고 개인의 영성에만 몰두하는 잘못된 경건주의(pietism)를 거부하고,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이 총체적인 세계관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35
표 1: 셰퍼가 제시하는 두 세계관의 대조
셰퍼의 논증 전체를 떠받치는 이분법적 구도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두 세계관의 핵심적인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이 표는 그의 철학적 주장의 핵심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왜 그가 두 세계관 사이의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는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구분 (Category)
기독교 세계관 (Christian Worldview)
인본주의 세계관 (Humanist Worldview)
궁극적 실재 (Ultimate Reality)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 (Personal Creator God)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우연 (Material, Energy, and Chance)
진리와 도덕의 기초 (Basis of Truth & Morality)
하나님의 계시 (성경) (God's Revelation - The Bible)
인간의 이성과 합의 (Human Reason and Consensus)
법의 원천 (Source of Law)
하나님의 법 (God's Law)
사회학적 법 (Sociological Law - what is good for society at the moment)
인간의 가치 (Value of Human Life)
하나님의 형상 (Made in the Image of God)
상대적, 기능적 가치 (Relative, Functional Value)
자유의 기반 (Foundation of Freedom)
하나님이 주신 양도불가능한 권리 (God-given Inalienable Rights)
국가가 부여하고 회수할 수 있는 권리 (State-granted, Revocable Rights)
필연적 결과 (Inevitable Outcome)
형태와 자유의 균형 (Form-Freedom Balance)
혼돈, 그리고 이를 통제하기 위한 권위주의 (Chaos, followed by Authoritarianism)
셰퍼의 정치신학은 법과 자유의 근원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그는 미국의 건국 아버지들을 인용하며, 미국이 본래 유대-기독교적 합의 위에 세워졌으며, 인간의 권리가 '양도불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국가가 아닌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33
이러한 관점에서 국가는 결코 자율적인(autonomous) 존재가 아니다. 국가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은 기관으로서, 악을 징벌하고 선을 보호해야 할 책무를 지닌다 (로마서 13장).3 따라서 국가가 하나님의 법에 반하는 법(예: 낙태 합법화)을 제정하기 시작할 때, 그 국가는 스스로 정당성을 상실하고 불법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다.
이 책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논쟁적인 부분은 시민 불복종에 대한 주장이다. 셰퍼는 국가가 폭정으로 변질되어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명령할 때, 기독교인에게는 불복종할 '권리'를 넘어 불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선언한다.36
그는 이러한 주장의 역사적·신학적 근거로 17세기 스코틀랜드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가 저술한 《렉스 렉스(Lex Rex)》, 즉 "법이 왕이다"라는 원칙을 제시한다.36 이 원칙은 왕(국가)이 법(하나님의 법에 기초한)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 아래에 있다는 사상이다. 만약 국가가 이 상위법을 위반하면, 국가 자체가 불법적인 존재가 되므로 이에 대한 저항은 정당화된다.40 셰퍼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내린 미국 정부, 특히 연방대법원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법 위에 둠으로써 "권위를 찬탈한(usurped authority)" 폭정이 되었으며, 따라서 시민 불복종의 조건을 충족시켰다고 주장한다.36
《기독교 선언》은 출간 이후 단순한 책 한 권을 넘어, 미국 기독교 우파의 정치적 상상력과 행동 양식을 규정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기능했다. 그 유산은 오늘날까지 미국 정치 지형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 책은 기독교 우파 지도자들에게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정당화하는 정교한 신학적·역사적 서사를 제공하는 교본이 되었다.2 셰퍼는 낙태, 세속주의, 다원주의에 대한 반대를 단순한 정책적 선호를 넘어, 문명의 존립이 걸린 영적 전쟁의 최전선으로 규정했다. 이를 통해 그는 활동가들에게 자신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거룩한 투쟁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고, 정치 참여에 대한 신학적 망설임을 제거해주었다.1
《기독교 선언》의 영향은 특히 급진적인 생명권 운동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셰퍼가 제시한 시민 불복종의 논리와, 낙태 위기를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비유한 강력한 수사는 '오퍼레이션 레스큐(Operation Rescue)'와 같은 단체들의 직접적인 행동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1 이들은 셰퍼의 주장을 낙태 클리닉을 봉쇄하고 그 운영을 방해하는 등의 대결적 전술을 정당화하는 신학적 명령으로 해석했다.32 셰퍼의 글은 생명권 운동을 단순한 시위에서 '불의한 법'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 운동으로 변모시키는 데 기여했다.
장기적으로 《기독교 선언》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특정 보수 신학과 공화당의 정치 강령 사이의 연대를 신학적으로 공고히 한 것이다. 셰퍼 자신은 기독교를 국가주의나 애국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을 경계했지만 32, 역설적으로 그가 제시한 '세계관'이라는 분석 틀은 바로 그러한 융합을 촉진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기독교 세계관' 대 '인본주의 세계관'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복잡한 정치적 사안들을 절대적인 선과 악의 영적 전쟁 구도로 재편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43 그 결과, 특정 정당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이 곧 신앙을 수호하는 행위로 등치되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미국 정치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셰퍼의 《기독교 선언》은 대중적 영향력만큼이나 학계로부터 날카로운 비판에 직면했다. 비판의 핵심은 그의 주장이 지닌 역사적·철학적 단순성과, 그가 제시한 이분법적 세계관이 초래하는 위험성에 집중된다.
학술적 비판가들은 셰퍼가 서구 사상사를 다루는 방식이 심각한 단순화와 왜곡으로 가득 차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헤겔, 키르케고르와 같은 철학자들과 칼 바르트, 폴 틸리히 같은 현대 신학자들에 대한 그의 평가는 종종 핵심 사상을 왜곡한 캐리커처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는다.44
예를 들어,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진리의 절대성을 무너뜨린 단순한 상대주의로 오해했으며, 키르케고르를 신앙을 위해 이성을 포기한 비합리주의자로 규정했다.44 또한, 칼 바르트와 폴 틸리히를 '신은 죽었다' 신학과 동일선상에 놓고 비판한 것은 그들의 신학에 대한 깊은 몰이해 혹은 의도적인 왜곡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44 이러한 지적 부정직성은 그의 논증 전체의 신뢰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요인이다.
셰퍼가 제시한 '기독교 대 인본주의'라는 명료한 이분법적 구도는 정치적 동원에는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그 자체로 심각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이원론은 세상을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식'으로 나누는 포위 심리(siege mentality)를 조장한다. 이는 정치적 반대자를 단순한 의견 차이를 가진 시민이 아닌,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게 만들어, 다원주의 사회의 근간인 시민적 담론과 타협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15 복잡한 사회 문제를 절대선과 절대악의 대결로 환원함으로써, 문제 해결에 필요한 섬세하고 다각적인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셰퍼는 자신의 주장이 신정정치(theocracy)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지만 1, 그의 논리가 귀결되는 지점은 사실상 그와 유사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법의 기초로서 '기독교적 합의'를 회복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비록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공적 영역에서 기독교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고 비기독교적 가치를 배제하려는 '기독교 국가주의(Christian nationalism)'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32 그의 이론은 국가가 특정 종교적 가치관을 강제하는 모델로 해석될 여지를 충분히 남기고 있으며, 이는 그가 옹호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 자유와 충돌한다.
셰퍼의 사상이 지닌 가장 큰 강점, 즉 복잡한 개념을 단순화하여 대중에게 전달하는 능력은 역설적으로 그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그의 영향력은 학술적 철학자나 신학자가 아닌, 평신도와 학생들 사이에서 폭발적이었다.2 그 이유는 그가 수 세기에 걸친 서구 사상사를 '기독교적 토대로부터 인본주의적 심연으로의 타락'이라는 하나의 단순하고 강력한 서사로 압축했기 때문이다.33 이 서사는 명확한 영웅과 악당을 제시하며 사람들을 행동으로 이끄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학계의 비판가들이 일관되게 지적하듯이, 이러한 단순화는 정확성과 섬세함을 희생시킨 대가였다. 그의 핵심 사상가들에 대한 독해는 종종 왜곡되거나 캐리커처 수준에 머물렀다.44 결국 《기독교 선언》의 정치적 성공은 그 지적 실패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책이 성공한 이유는 서구 사상에 대한 엄밀한 분석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불안에 떨던 한 세대의 복음주의자들에게 단순한 지도와 명확한 적을 제시한 강력한 선동의 수사였기 때문이다. 이는 대중적 소통의 효과성과 학문적 분석의 책임감 사이의 근본적인 긴장을 드러내는 사례이다.
본 보고서는 프랜시스 셰퍼의 《기독교 선언》이 그의 개인적 사상 변천과 1980년대 초 미국 사회의 정치적 격변이라는 두 가지 맥락 속에서 탄생했음을 밝혔다. 이 책은 기독교 세계관과 세속적 인본주의를 적대적 관계로 설정하고, 법의 기초가 창조주 하나님께 있음을 역설하며, 국가가 그 신적 위임을 배반할 경우 시민 불복종이 정당화된다는 급진적 주장을 펼쳤다. 그 결과, 이 책은 미국 기독교 우파의 정치적 각성을 촉진하고 그들의 행동주의에 강력한 신학적 명분을 제공하는 기폭제가 되었으나, 동시에 철학사와 신학사에 대한 왜곡, 위험한 이분법적 사고, 그리고 기독교 국가주의로 흐를 수 있는 모호성 등 심각한 비판에 직면했다.
셰퍼의 유산은 영감과 경고라는 양면성을 동시에 지닌다. 그는 신앙을 사적인 영역에만 가두려는 경건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기독교인들이 문화와 사회 문제에 대해 총체적으로 사유하도록 도전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37 그는 "그리스도인은 사회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가?", "신앙과 정치, 신의 법과 시민법의 올바른 관계는 무엇인가?", "국가에 대한 저항은 언제,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와 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중대한 질문들을 던졌다.48
그러나 《기독교 선언》은 동시에 절대적인 신학적 확신이 특정 정파의 정치적 의제와 결합될 때 발생하는 위험을 보여주는 경고의 사례이기도 하다. 그의 선언이 촉발한 문화 전쟁의 논리는 미국 기독교를 분열시키고 사회적 신뢰를 약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따라서 2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셰퍼의 《기독교 선언》은 맹목적으로 추종해야 할 지침서가 아니라,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할 역사적 텍스트로 남는다. 그의 열정과 통찰을 배우되, 그의 시대착오적 단순성과 이분법적 오류를 반복하지 않는 지혜가 요구되는 시점이다.